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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검도(켄도)인들의 친일행각과 전통 본국검의 훼손
· 작성자정보 홈지기   - Homepage : http://www.bonkukkum.com
· 글정보 Hit : 10784 , Vote : 921 , Date : 2010/12/02 22:16:55
 

3 ) 建陽 원년(1896)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 건양 원년 5월 23일 條에 '巡檢擊劍諸具 購入費 319원'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지금으로 부터 1세기 전에 경무청이 치안의 필요에서 격검을 경찰교습과목으로 채택한 것이 오늘날 일본에서 우리민족 정기와 우리 고유 문화를 말살하기위해 강제 도입된 켄도, 즉 한국식 명칭인 검도를 시작한 계기라고 봐야겠다. 그후 1904년 9월 27일 오늘날의 국방연구원에 해당하는 장교들의 재교육기관인 육군연성학교에서는 육군의 교육체계를 세우는 한편 전술과, 사격과, 체조과, 검술과를 신설하여 6개월 과정의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검술이 군경사이에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개적인 최초의 경기대회는 1908년 3월 28일 오후 2시 40분부터 내각원유회 주최로 거행되었는대, 한일 양국 巡査격검시합을 경무청 주관으로 비원에서 개최되었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폐하가 친람할 예정이었으나, '玉變靡寧'의 이유로 불참했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국제경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당시 무관학교장이었던 李熙斗와 학무3국장이었던 尹致旿에 의하여 발기된 단체로서는 무도기계체육부가 있었다. 이 단체는 교육계의 청년과 일반국민의 체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처음에는 군인 구락부로 활동을 개시하여 체육종목으로는 習絲, 승마, 柔術, 격검의 4개 종목이었다. 점차 일반에게도 검술에 대한 이해가 깊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는 대한, 태극 등 共修硏究會라는 우리 유학생단체들이 동경 중구 6지 9호에 있던 대한유학생 감독부에 모여 대한유학생 운동부를 두고 그 당시 일본 국내에서 널리 하고 있던 운동종목을 다방면으로 채택하고 있었다하니 검술도 보급의 범위안에 있었던 것으로 사려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체육계의 초창기였던 만큼 하나의 밑거름 역할이었다고 보겠다.




(4) 사립오성학교와 조선무도관

1916년 5월에는 사립오성학교에서 검도시설을 갖추어서 일반 청년층을 모집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학교검도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또 1921년 11월 19일에는 원동에 있는 휘문고보 부근에다가 사설도장을 설립한 강낙원 선생이 격기종목인 검도, 유도, 펜싱, 권투를 직접 지도하였다 하니 이것이 한국 도장검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조선무도관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5) 연희, 보성, 이화여전의 검도 써클 창설

1925년 경성운동장이 완공되면서 총독부 주도하에 조선체육협회가 설립되더니 서울 남산에다가 저이들의 國祖를 모신다하여 조선신궁이라는 것을 지었다. 그리고 제 1회 조선신궁경기대회를 가졌으나 조선인이 이 대회에 참가하였는지는 모른다.

이 시기는 일제는 1927년 4월 1일부터 중학교 체조교육부문에 검도를 채택함으로써 중학, 전문학교에 스포츠 체육종목으로 강조함과 동시에 교우회 활동에도 권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전에서도 검도 서클이 탄생되었다는 것은 이미 밝한 바 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1929년 일본의 수도학원(高野佐三郞)을 졸업한 강낙원 선생이 체육교수로 재직하면서 검도를 직접 지도하였고,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수학하면서 검도부에서 수련하다가 보성전문에서 검도를 시작하였으며, 이화여전에서는 김활란 박사가 克日을 위하여 검도부를 창설하였고, 연희와 이화는 서로 자주 교류를 하였다 한다.




(6) 조선체육회의 출발

일본총독부 학무국 지시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선체육협회는 일본인들의 전행기관이었다. 이에 반기를 들고 조선인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새로 창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검도부문에서는 강낙원 선생과 이종구 선생이 창설 멤버로 참여하였다는 대한 체육사 기록에 남아 있다.




(7) 大韓劍士會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검도부흥'의 꿈을 실현코자 모인 인사 중에서 일제시 鍊士號라는 칭호가 수여되신 일본 關西대학 출신인 서정학 선생이 오사카 부 검도부에서 활약하다가 敗國후 경기도 경찰국 道助敎로 임명되었다. 해방후 일찍이 관계에 투신하였던 서정학 선생과 도쿄농대에서 보성전문을 거쳐 경기고보 교사로 계시던 이종구 선생과, 국내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1941년까지 있었던 高野佐三郞의 수도학원을 畢한 조선무도관의 長인 강낙원 선생, 일본 후쿠오카 현에서 검도수업을 하다가 귀국한 후 검도를 위하여 경찰계에 몸담고 계시던 김영달 선생, 일제부터 경찰 검도계에서 활약하던 故 호익룡 선생들이 중심이 되어 1948년 6월 3일, 재경유단자회를 창덕궁 도장에서 개최, 대한검사회라 叫稱 임시회장에 강낙원 선생이 피선되었다.




(8) 경찰검도의 왕성

1945년 서정학 선생이 UN司 경찰부 조선경찰학교 미식훈련 교육관으로 임명된 후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검도와 유도를 경찰에서 필수 교육과목으로 채택도록한 것이 경찰검도 시작의 역사적 기점을 이룩하였다.

1949년 5월에는 경찰 상무회를 조직,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1950년 4월에 제 1횔 전국경찰검도대회를 개최하였으나 곧이어 6.25사변의 유발로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그러나 1953년 대통령 경호실장었던 서정학 선생이 排日사상이 철저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이대통령탄생격축 친선 무도대회를 경무대에서 개최하여, 1953년부터 일반부만을 하다가 1957년 제 5회부터 1959년의 최종대회까지는 학생부를 첨가하였다. 이와같이 경찰검도의 경기 event가 기폭제가 되어 전반적인 검도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에는 교도관대회가 시작되었다.




(9) 대한검도회의 출발

1953년 11월 20일 일본켄도의 한국지부인 대한검도회가 재조직되고, 한국검도를 통할 지도하여 국민의 체위향상과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한 체육회에 가맹, 같은 해 12월 각 시도에 사범을 배치하고, 1959년 6월 13일 제 1회 전국학생검도대회라는 최초의 검도회 주관 event를 시작한것이라고 보겠다. 이 시기의 한국 검도인 중 고단자는 8단부에 서정학, 이종구, 호익룡 선생이었고, 7단에 김영달, 정태민, 도호문, 정동섭, 박우영 선생뿐이었다. 이사람들은 일제시대 순사 등의 직업을 가진 제국주의자의 끄나풀 역활을 한 한국 침략의 압잽이들로서 이 모두다 친일인사들 이었다.




(10) 전국체전과 제 1회 학생검도대회

검도는 1955년 전국체전부터 일반부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으나 1956년에는 고등부, 1959년에는 대학부 순으로 증가하였다. 동시에 검도회는 학생검도의 중요성을 참작, 제 1회 학생검도대회를 주관 개최하였다. 1961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正果로 채택하면서 김영달 선생이 출강하게 되었고, 일반대학에서는 서클검도가 부흥되자, 1964년에 대학연맹과 중고연맹으로 분리 개최하게 되었다.




(11)검도 event의 다변화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실로 energetic한 발달상이었다. 1967년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는 제 1회 이충무공탄신기념대회 개최(말도안되는 명분이다, 이순신장군은 왜인들의 참략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한 성웅이신데, 일본켄도인들의 충무공 탄신기념대회는 어불성설이다)1972년 제 1회 문교장관배대회, 그해에 시작한 소년체전 개최, 또 기성 검도인을 위한 동서고단자대항전이 1977년 부터 개최, 1979년에는 제 1회 대통령하사기 일반선수권전 등의 행사가 줄을 이었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과 때를 같이하여 7WKC를 한국에서 개최하자, 한국검도의 개화기를 맞이한 듯하였다. 이때 사회에서는 사회인 검도가 확산되어 가며 요원의 불과 같이 일어나는 市井 도장의 증가는 드디어 사회인 연맹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하나의 운동이 팽창하고 확대해지면서 bubble 현상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unique한 내용 충종이 있어야 한다. 본국검의 연구와 개발을 한다는 의미에서 본국검경연대회를 갖게 된 것은 때늦은 감이 있으나, 마땅히 하여야 할 과제였다. SBS 전국검도왕대회를 유치하기 위하여 노력한 박철무씨의 노력에 감사하며 검도가 뉴미디어 시대의 전파에 탄 것은 실로 놀라웠다.

이리하여 대한검도회는 사회법인체가 되었다. 그러나 법인체에 걸맞는 어떠한 사업을 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4. 검도경기의 脈




(1)전국체전

국내경기로서 해마다 10월에 막을 여는 전국체전은 1920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 1회 대회부터 起算하여 회수를 계산하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대회를 열지 못하는 연도도 이를 통계한다는 규정에 따라 1945년 해방년도의 대회를 제 26회로 산정하게 되었다.

제 26회 대회 이전의 어느 대회로부터 검도종목이 있었는가를 찾아보겠다. 기록상 1935년 제 16회 대회기록에는 휘문고보의 강성균 9전 9승, 1936년 제 17회 조선무도관의 정석래 승 1937년 제 18회에는 휘문고보의 강성균 7연승으로 그 기록이 남아 있고, 1938년에 소위 支那사변 반발로 중단하였다 한다. 이후 대동아전쟁 동안은 대회가 없다가 1945년에 당연히 개최하여야 할 것이나, 정치적 혼미 속에 간과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연차적으로 제 29회가 되는 1948년에야 시도대항전이 개막되었으나, 검도는 1955년 제 36회부터 일반부 대항전만으로 시작되었다.제 37회 때는 중,고부를 加하고 제38회에 가서 대학부가 加하게 되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체전운영은 각 시도행정기관이 국민체육진흥이라는 국가시책의 일환으로 행하여진다. 그러므로 승패가 각시도 자체적으로는 명예에 관계되므로 중, 고, 대, 일반팀 창설의 촉매 역할이 되어서 행정기관을 통한 보급의 원동력적 역할을 하였다.




(2)국제사회인검도선수권 대회

International Non-Professional Kumdo Grand Match

국제적인 검도대회가 없던 중 1965년에 한, 중, 일 , 미, 하와이, 오키나와를 일환으로 하는 국제사회인 검도구락부가 주도하는 국제사회인검도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서정학 선생이 창설 임원으로 참석하였다.

제 1회 대회(1965년)는 대만에서 개최하였으나 한국은 불참하였다.

제 2회 대회(1966년)는 오키나와에서 개최. 한국은 단체전 2위였다. 서정학 선생을 필두로 도호문, 정태민, 김영배, 서동준, 강용덕, 정동욱, 신준식, 이용팔 등 원로 선생들이 선수로 참가하였고, 개인전 6단 이상에서 정태민, 도호문 선생이 3위 입상을 하였다.

제 3회 대회(1967년)은 10월 20일 오사카에서 개최. 단체전에 김영달, 정태민, 서동준, 강용덕, 김석춘, 정동욱, 윤병일, 김춘경, 김재일, 천화성 선생이 선수로 참가하여 단체전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개인전에서는 6단 이상에서 서동준 3위, 5단 이하에서는 윤병일 1위, 김재일, 천화성이 3위였다.

제 4회 대회(1969년 4월 24일)는 서울서 개최. 단체전 2위, 개인전 6단 이상 윤병일 3위, 5단 이하 김춘경 1위, 이경제 3위.

제 5회 대회(1971년 10월 5일)는 대만에서 개최. 단체전, 개인전 모두 전패.

제 6회 대회(1973년 4월 17일)는 오사카에서 개최. 단체전 2위, 5단 이하 남승희 2위, 이호암 3위, 6단 이상 이홍국 3위.

제 7회 대회(1975년 4월 19일)는 서울 장충체육관 개최. 단체전 우승, 개인전 6단 이상 김춘경 2위, 김재일 3위, 5단 이하 장숭학 2위, 김화태, 박갑순 3위.

이상과 같이 국제사회인대회는 전일본검도연맹이 결정된 후 1970년에 일본이 주도하여 국제검도연맹을 결성하여 제 1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으며, 한국은 제 7회 국제사회인대회를 참가를 마지막으로 이탈하였다. 그러나 IKF의 WKC가 있기 전의 국제검도교류 경기사항에서는 그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3)세계검도선수권대회

ㅠㅜWorld Kendo Championship

*1 WKC - 1970년 일본 개최. 단체, 개인전 모두 패.

*2 WKC - 1973년 미국 개최. 개인전 이종림 3위 입상.

*3 WKC - 1976년 영국 개최. 불참.

*4 WKC - 1979년 일본 삿포르 개최. 단체전 2위.

*5 WKC - 1982년 브라질 상파울로 개최. 김동수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21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 선수를 선발하여 강화훈련을 여러 차례 하고 출전하였으나, 단체전 3위에 끝났다. 국제심판으로 이호암, 양춘성이 참가. 동아일보 이광석 기자 동행함.

*6 WKC - 1985년 파리대회에서는 단체전 3위였으나, 개인전 마지막 4강전에서 일본인 2명과 한국의 김경남, 박중채가 격전하였다. 그 당시 일본과 쌍벽을 이루는 한국검도의 자부심을 갖게 하였으나 한국은 2명 다 3위에 머물렀다. 국제심판으로 최상조, 이호암, 양춘성 참가.

*7 WKC - 1988년 서울에서 개최.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은 실로 한국검도사 초유의 대 event이다. 6 KWC때의 총회에서 7 WKC를 일본 교토에 유치하고자 한 일본측과 최상옥 회장과 故 도호문 선생의 공로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대회준비를 위해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국제준비집행회의에서 진력한 최상옥 회장과 이종림 전무, 이호암, 서병윤 이사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단체전 2위, 개인전에서는 김경남이 3위였다. 심판장에 서정학 선생, 심판에 양춘성, 유기순, 김재일이 참가.

*8 WKC - 1991년 토론토 대회에서는 부진하여 단체전 2위, 개인전은 전패의 성적이었다.

*9 WKC - 1994년 파리에서 개최하였으나 우리 한국은 단체전 2위, 개인전 입상없이 기록되었다.

결국 한국은 세계대회에서 일본을 한 번도 못 꺾었다. WKC전에서 가장 분투하였던 대회는 1988년 서울대회에서의 성적이었다. 개인전에서 김경남이 3위에 그치고, 단체전에서 일본에 패하였기는 했지만. WKC에서 가장 부진하였던 대회는 1991년의 캐나다 토론토 대회였다. 개인전 입상 없음. 이종림, 이호암, 양춘성, 김재일이 국재심판으로 참가하였다.




5. 켄도인들의 우리 고유의 본국검 훼손의 심각성




동양적 검도판도권에서 한국검도의 역사성과 자존심을 찾기 위하여서는 무엇 보다도 우리의 고무예 안에서 劍技譜를 찾아야 했다.

동양 3국 중 중국은 세계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황하문명은 기원전 1300년부터 청동기 시대로 들어간 만큼 고무예에 있어서도 찬란하다 하겠다. 중국검술의 一端을 개관하기 위하여 우선 검기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찾아보자. <武編><紀敎新書><陣紀><長槍法選><單刀劍選><武備志><十三刀法>의 劍譜가 현존하고 있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유입에 급급하였다 할지라도 陰流, 一刀流, 神道流를 중심으로 200여 유파가 각각 갖고 있는 劍譜는 민감하게 받아들인 검술문화를 다양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 한국으로서도 당연히 하나의 unique한 검술문화는 있었다.

그러나 정치지리적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는 외세의 간섭과 침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 독점 아래서 모든 것을 말살당해서 신라의 <武島兵法>, 고려의 <金海兵書>는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다. 21세기를 향한 우리는 한국검도를 고무예 속에서 그 뿌리를 규명하고, 검도의 正史를 밝히되 스포츠 검도를 유입한 한국이 국제검도계에서 엄연한 존재라는 논리를 세우고 그 이념을 확인해 보겠다는 것이다.

1960년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유일하게 조선 고무예를 추구하여, 일본검술이 아닌 것을 주창하던 송성식 선생이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실로 고독한 조선검술 추구자였으나, 조선적인 무예를 추구하겠다는 그 의욕은 높이 평가하여야겠다고 본다. 이러한 한국적인 것의 추구는 1971년 10월 23일 부로 이호암 대학연맹 지도위원이 '검도에 있어서 하카마 배제에 관한 件'을 한국검도회 회장 앞 (검도회 각 이사, 전국대학연맹 회장, 전국 중고등 검도연맹 회장 참조)으로 제출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점차 한국 고무예 또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연구는 왕성해 가서 1977년 10월에 이호암이 '한국검도론'을 발표하고, 성균관대학에서 이종림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1983년 12월에 '한국고대검도사에 관한 연구 (신라 본국검을 중심으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켄도를 습득한 자들은 우리민족 고유의 검술을 이해할 수준이 갖춰져 있지않은 상태에서 왜색을 벗기 위한 치졸한 형태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당히 일본 켄도를 전수하면되지 왜 사이비한 짖을 하는가?

1970년대 성균관대학 검도장(지금은 도회관)이 서울의 검도인들에게는 중앙도장 역할을 할 때였다. 이곳에서 한국의 名著인 <武藝圖譜通志>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여지자,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갖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주에 본을 두고 신라 화랑 풍월주인 조부의 영향으로 어릴적 부터 우리 검술을 익힌 (사)대한본국검협회장 이대산 도총사는  1980년초에 민족무예연구회를 설립 고유한 민족검법인 본국검의 체육학적 발전을 위해 복원연구를  거듭하여 경남 마산에서 도장을 설립, 제자를 양성하여 왔으며, 1990년 초에 대한본국검협회를 설립하였다. 바야흐로 민족겁법인 본국검의 국민적 보급을 위해서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검도인 대한검도회에서는 우리 고유의 본국검을 제대로 검정하여 복원하지 못한상태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승단, 승급심사과목으로 채택하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거합도의 본을 초단심사과정으로 채택했다가 국내의 전통검도 단체가 발전을 하니까  견제하기위해, 왜색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위해  허겁지겁 거합의 본을 버리고 완벽하지도않은 그들나름대로 연구한 본국검의 기법을 승단심사기준으로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6. 중앙도장의 꿈
경기단체로서 구심적이고 중앙집약적인 중앙도장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필연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의 사설도장은 우후죽순처럼 증가되어 가도 중앙도장 건설 문제는 우리들의 뇌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해방후 그 많은 산전수전에서 접수할 것을 놓쳤고, 부동산 가격이 저렴하던 시대를 놓쳤고, 정부 권력기관에게 완곡한 청원을 할 사람도 없고, 비인기 종목이라는 명목하에 완전히 시기를 逸失하고 말았다. 그래도 1982년부터 임대 중앙도장이라고 해서 원서동, 홍제동, 교도소 도장, 경기여고도장 등으로 전전하다가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참으로 부끄럽고도 슬픈 일이다.




7. 團圓을 향하여
지금 한국검도는 중앙검도회는 있으나 중앙도장이라는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확실한 교육적 system과 curriculum도 없는 中, 高, 大를 통한 학교 검도분야와 자본주의적인 자유체   제하에서의 상업주의에 흐르기 쉬운 市井도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체육분야에서의 검도가 병존하고 있다.

경기단체는 경기에서 우승으로 그 면목을 유지하고 검도강국으로 부상되는 만큼 소위 엘리트 검도의 육성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는 이 마당에서 WKC에서 覇者의 꿈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의 중요한 과제를 우리들 한국검도인은 인식하면서 <1>학교체육검도의 정립, <2>사회체육검도의 정립, <3>검도강국을 위한 엘리트 검도의 촉진이라는 이 3대 목표가 달성할 수 있는 대단원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보면 대한검도의 치부가 보인다.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민족의 성지인 오성학교와 성균관 대학교를 입에 올리다니..

오성학교와  성균관대에서 켄도를 채택하였다면 친일을 하기위해서 하였겠는가..?

대구의 계성학교 가 유도를 교기를 정할때 당시 아담스 선생께서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시며..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일.. 즉 일본을 알아야만 일본을 이길수 있다

라고 주장 하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계성학교는 비록 교기가 유도 였지만 대구경북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활을 했지요..

오성학교와 성균관 대학교도 마찬 가지 였을 겁니다..

심산 선생께서 구국의 일념으로 모든 재산을 후진양성에 힘쓰시고 가족들을 데리고 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영원한 젊은이.. 심산 김창숙 선생...
안동에 그의 본가가 있는데... 그앞에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 집니다

초창기 켄도는 친일 세력들의 집결지였다..

이화여전 에서 김활란이 극일을 하기위해서 켄도를 가리켰다니..
개가 웃을 일 입니다.

김활란은 일제시대에 이땅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나아가서 군인들을 기쁘게 해준는것이

천황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요지로 전국 방방 곡곡 다니며 연설을 하다가 해방후 재빠르게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빌어붙어 항일독립운동가로 옷을 갈아 입었다는건 일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김활란을 독립운동.. 혹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 켄도를 이화 여전에서 검도부를 창설했다니..

저자가 우메하거나 친일세력의 후예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해방후 검도 부흥을 꿈 꾸었다는데..
언제 이땅에 켄도가 흥한적이 있었던가?

언제부터 켄도가 이땅에 뿌리 내렸는가?

역대 대한검도 회장들의 과거 행적과 켄도하는 사람들의 일제시대 행적을 공개하라!!!

일본의 개들이 일본의 향수를 못잊고 하꼬마가 그리워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사무라이를 동경하던 쪽바리들의 개들이 화랑도로
옷을 갈아 입었다..

조병옥.. 장택상..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로 청산되어야할 일제의 잔재 들이다.

이들이 이승만과 함께 일제시대의 순사들을 불러모아서 권력기관으로 등장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여전히 핍박하였다..

조병옥이 켄도를 후원했다는걸 영광으로 여긴다는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리고이승만 탄생기념축하검도 대회라..

이승만은 누구인가?

그가 항일을 했다고는 하나, 하와이 노동자들이 피땀흘려 모든돈을 유용하였으며

임시정부시절 대통령 안시켜주면 항일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김구 선생께서 부통령이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해방후의 행적은 말 안해도 다 아시는 바이다..
이땅에 권력의 화신을 주인으로 모시는 결과를 가져 왔다.

김구선생을 암살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일등공신 일제순사들..

이승만이 그 더러운 놈들과 달콤한 열매를 함께하였다는건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헌법 전문에 보면 우리나라는 삼일 정신을 계승하고 임시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명시 되었었다..

1896년부터 이땅에 검도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럼 그이전에 이땅에는 검도가 없었단 말인가?

켄도인들아~~

삼일함성이 방방 곡곡 메아리 칠때 , 수많이 젊은이들이 신흥무관학교에서 젊음과 목숨을 희생할때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충무공의 탄신기념일에 맞추어서 켄도대회를 열었다니...
지하에서 충무공이 곡할 노릇입니다..

임진왜란시 왜구들을 소탕하는데 온몸을 불태우신 선조들의 영령앞에서..

하꼬마자락 펄럭이며 굿판을 벌였다니..

민족문화를 배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민족무술을 핍박하는가?

왜 하필이면 심산선생께서 설립한 성균관대학교에서 켄도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는가?
심산선생의 항일운동을 욕되게하고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취지가 무색하고

이땅에 민족교육을 일으키기위하여 십시일반 돈을 모은 선조들의 정신을 왜곡하는 행위다.
더러운 일본의 낭인들에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쓰라린 과거를 되풀이하는 행위다..

성균관은 우리 한국인들의 성지다.
꼭 한국인들의 성지에 일본의 칼을 꼿아야만 하나?

더러운 역사를 이젠 단죄해야된다.

대한검도회만이 진정한 화랑도의 후예라면 신라시대 화랑들이 사각 대나무 쪼가리를
가지고 무예를 연마했던가?

켄도는 일본에서수많은 검도 단체중 하나일 뿐이다.
고유 무술이 진검을 가지고 수련한다고 욕하고 사이비라고 한다면 ..

켄도의 뿌리가 되는 거합검도는 무엇인가?
과연 거합검도에 사이비라고 말할베짱과 용기가 있는자 있는가?

지금 현재 사이비 논쟁이 불 붙었는 데..사이비의 사전적 의미는 알고있는가?

사이비는 유사한 혹은 흡사한 이란 뜻이 있는데..
진정 사이비논쟁을 한다면 진검도 아니면서 진검 인척 흉내내는 켄도야말고
사이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켄도의 전승자들이 한민족 고유의 전통검법인 본국검과 조선세법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
하면서 왜색을 포장하기위해 아무렇게 번역하여 사용하는 행위야 말로 사이비가 아니고
무었이 사이비인가? 그것이 정도요, 정법인가?

자기들이 누워서 자기를 욕하는 행위를 자행하면서도 우매하게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한국 전통도 아니면서, 일본전통이면서 우리전통이라고 속이는 것이 사이비가 아니고
뭐가 사이비인가?

켄도는 그냥 켄도일 뿐이다..
켄도의 그 고유한체계와 수련방법과 정신세계는 높이 평가한다..

국제경기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국위선양을 한점은 높이 평가 되어야 된다.
그리고 전통무술을 주창하는 일부 단체들이 돈벌이에 급급해서 무자격자를 교사로 임명하는데

민족문화를 욕되게 하는것은 지탄 받아야 된다..
그러나 민족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하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한검도회는 더 이상 켄도를 일본 군국주의의 산물이라고 해야지 민족문화라고 대한민국 국민을  속여서는 안된다..
그런 사이비한 일이 지속되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단죄를 내릴 것이다.

그 때는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을 것이다.

                                                               어느 켄도인의 양심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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