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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시대 본국검의 발달

고대의 칼은 마제검과 청동검 임을 잘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시조는 단국(단군왕검)이라고 한다. 이 시기는 부족국가의 탄생기이며 청동검의 시대이다. 한단고기를 보면 단군의 시대에 단전호흡과 명상을 통한 홍익인간 정신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부터 본국검도의 수련법 중의 하나인 기공수련이 한민족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유물 중 청동거푸집과 검이 많이 발견괴고 있다.
초기에는 청동검과 철제검이 동시에 사용되었고 약한 청동검은 가치를 잃어가고 철제검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우리나라 고대 철 기술은 중국보다 발전되었는데 이는 특히 남부지방의 가야 중심으로 철이 발달되었다.
고대 우리나라는 철 기술이 발달해 중국과 일본 등으로 수출되었음이 중국문헌에 남아 있다.
본국검 재원의 고장인 창원에는 지금도 고대에 야외에서 철을 주조하던 야철지가 남아있고 철새 도래지로 잘 알려진 주남저수지는 중국으로 철을 수출하던 갈대의 나라였던 것을 많은 유물로 통하여 알 수다.
우리나라는 부족국가의 발달과 철기의 발달로 인하여 칼이 일상생활과 일정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의 경우도 넓은 영토로 인하여 철기, 목기, 석기, 짐승 등이 전투에 동원되었고(삼국지 제갈공명편)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하고 여러 부족국가가 전투에 대비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검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중국고서에 나타난 우리검의 기록을 찾아보면<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海外東經ㆍ기원전2300년께)에는「군자국은 북쪽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 호랑이를 옆에 두고 부린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를 않는다.」라고 나와 있는데 단군시대에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보고 군자국이라 칭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표현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현명하고 의젓한 선인풍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또 《단국세기(檀國世紀)》에는 「11세 단군 도해(道奚ㆍ재위57년)경인원년(기원전1891년)단제께서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했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雄常)이라 이름 했다. 이때 국자랑(國子郞)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생각하옵건데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 백성들을 교화하였습니다.
이에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의관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이러한 내용은 고조선시대의 검은 일상생활에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검의 제작기술도 매우 발달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검은 전투수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였으므로 검 제련 기술도 매우 발달하였던 것이며, 중국 사람들이 전수해 갈 정도로 검 제련 기술이 우수하였던 것이다.
치우가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칼을 제작하여 황군의 군사를 물리쳐 구혼에 올랐으므로 고조선 이전에 벌써 우리나라에 생산되었으며, 고조선시대는 한층 더 검의 제조술이 발달하였다.